1979년 11월 23일 금요일
어제는 저녁 먹고 원임이하고 희숙이 누나집에 놀러갔었다.
아랫방에서 우리끼리 화투를 치고 놀다가 별 재미가 없어서 테레비가 있는 큰 방으로 갔다. 그 방에는 번쩍 번쩍 자개가 박힌 큰 장농주위에 14인치 작은 테레비가 서랍이 두 개 달린 나즈막한 선반위에 올려져 있고 아랫목에는 저녁 밥할 때 데워진 바닥이 식지 않도록 이불이 깔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지매는 다른 집에 놀러 갔는지 없고 숙영이 누나 혼자 비단을 하고 있었다. ‘ㄴ’자 형태로 생긴 비단틀에 올라 앉아 왼손은 비단을 잡아 한 점 한 점 바늘처럼 뾰족한 비단틀 코에 끼우고 오른손으로는 실이 감긴 비단실꾸리를 아래에서 위로 돌리며 두 번씩 적당한 힘으로 척 척 당겨서 매듭을 만드는 작업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아마도 우리 동네에서는 제일 이라고 한다. 비단은 엄청 부드러운 흰색의 천인데 거기에 까만 점들이 어떤 규칙을 이루며 무수히 박혀 있다. 그 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단틀 코에 꿰어서 비단 실꾸리의 실로 촘촘히 묵어야 한다. 비단 한 필의 길이는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래도 10미터는 될 것 같다.
‘10미터의 비단 한 필에 박혀있는 까만 점은 몇 개나 될까?’
옆의 테레비는 혼자서 화면을 바꾸어 가며 이것 저것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숙영이 누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비단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귀로는 테레비를 듣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손과 눈은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계속 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기야 한 번 이라도 잘 못해서 비단이 망가지면 큰 돈을 물어주게 될 거고, 아니면 바늘 만큼 뾰족한 비단침에 손이라도 찔리면 피도 나고 엄청 아프니까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가 없을 것이다.
비단은 우리 집에서도 한다. 어무이도 하고 엄마도 하고 누나들도 하지만 어무이가 제일 많이 한다. 비단을 한 필 하면 돈을 얼마씩 받는다는데 그게 농사 외에 돈벌이가 별로 없는 우리 마을에서 농사일이 없을 때나 밤에 여자들이 하기에는 좋은 일거리란다. 그리고 시집 안 간 여자들이 시집갈 때 까지 비단을 열심히 해서 번 돈으로 시집갈 때 혼수를 마련해서 가기도 한다. 어무이는 보통 한 달에 두 필 정도하는데 많이 할 때는 세 필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가지고 있으면 어떤 아줌마가 한 달에 한 번씩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그것들을 모으고 그에 해당하는 돈을 준다. 어무이도 그렇게 돈을 받는 날, 어쩌다가 재수가 좋을라 치면 우리는 점빵에 가서 까자를 사먹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비단을 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는 일만은 아니어서 혼자 하고 있으면 심심하니까 보통은 여럿이 한 집에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가면서 한다. 그래서 저녁에 집밖에 나가보면 아줌마들이 저마다 비단틀을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한다. 오늘 저녁은 이 집, 내일 저녁은 저 집 이런 식으로 하는데 갈 때는 삶은 고구마나 강정이나 박상이나 하다 못해 잘 생긴 무시라도 갖고 가서 늦은 시간 배고픔을 달래기도 한다. 근데 이래 많은 비단을 해서 누가 머 하는지 나는 모리겠다. 아주 비싼 거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지 모린다.
그래도 숙영이 누나는 오늘 밤에도 엄청 열심히 비단을 하고 있다.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진짜 번쩍 번쩍한 자개가 박힌 큰 장농을 사서 갈라꼬 그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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