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02월 10일 일요일
1주일 뒤면 설이다.
그래서 엄마가 아침에 소죽끼리는 큰 솥을 깨끗하게 씻고는 거기에 우리보고 샘물을 퍼다가 가득 채우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와 그카는지 퍼뜩 알아차렸다. 설이 되기 전에 목욕을 시킬라꼬 그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듯이 겨울에 목욕을 자주 하는 것은 어렵다. 테레비를 보면 도시에는 넓은 탕에 뜨겁은 물이 가득 차있는 곳이 있고 그곳에 들어가서 천천히 때를 불리고 밖으로 나와도 찬바람을 막아 주는 곳이 있어서 춥지도 않게 앉아서 때를 밀 수 있는 목욕탕이 있다카는데 나는 아직 가본 적이 없다. 우리는 겨울에 두 번, 많으면 세 번 까지도 목욕을 한다. 늦가을, 겨울이 오기 전에 한 번 하고, 한 겨울 설이 오기 전에 또 한 번 그리고 봄이 오고 날이 풀렸을 때 하거나 아니면 여름까지 기다린다.
엄마는 물이 가득 든 큰 가마솥에 아침부터 불을 때기 시작해서 다음에 제법 굵은 장작을 서너 개 그 불길 안에 던져 넣고는 김치 담을 때,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용도로 쓰는 큰 빨간 고무다라이를 창고에서 꺼내왔다. 그리고 그거를 샘가에서 찬물로 대충 씻고 우리보고 아랫방 안에 이불을 걷고 퍼런색 갑바를 접어서 깔고 그 위에다가 그거를 갖다 놓으라고 했다. 그런 다음 엄마는 또 샘물을 퍼담을 때 쓰는 오그랑통과 박재기를 같이 가마솥 옆에 갖다 두었다. 그리고 때를 밀때 쓰는 꺼칠 꺼칠한 거의 다 닳아서 구멍이 날듯한 손바닥만한 뻘건색과 누런색 때밀이 수건과 비누를 빨간 다라이 옆에 두고, 목욕이 끝날 때 닦을라꼬 수건도 몆 장 그 옆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빤스와 난닝구와 내복을 그 옆에 차곡 차곡 쌓아 두었다. 그렇게 준비해두고 가마솥에 그득한 물이 펄펄 끊기 시작하는 점심때부터 우리는 목욕을 시작했다.
먼저 희야가 목욕을 시작했는데 엄마가 바가지로 뜨거운 물을 반쯤 채운 오그랑통을 열 댓 걸음을 걸어서 방 앞에 있는 작은 마루에 올려두고 거기를 올라선 다음 다시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빨간 고무다라이에 들이 부었다. 이렇게 두 번을 붓고, 그 다음 우리더러 샘에 가서 찬 물을 오그랑통에 담아서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렇게 뜨거운 물 두 번과 찬 물 한 번을 섞어 놓으면 목욕을 할 만큼 적당한 온도가 된다. 희야는 혼자 먼저 통에 들어가서 깨끗한 물에 때를 불리고 때를 밀고 머리도 감고 나중에 엄마가 들어가서 손이 닿지 않는 등거리를 밀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을 행구기 위해 엄마는 이번에는 찬 물을 반쯤 채운 오그랑통에다가 뜨거운 물을 적당하게 부어서 다시 한 번 더 방안으로 가지고 갔다. 희야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몸을 행구고 수건으로 닦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 다음은 원님(누나)이 차례다. 희야가 했던 목욕통에 이번에는 원임이가 들어간다. 다만 목욕물이 어느 정도 식었기 때문에 원임이가 통에 들어가기 전에 엄마는 한 번 더 뜨거운 물을 가져다가 거기에다 들이 부었다. 물은 더 많아 졌지만 깨끗하지는 않다. 원임이는 더러운 물에 들어 가기 싫다고 하다가 엄마한테 등거리를 한 대 찰싹 맞고는 그제서야 입을 삐죽거리며 통에 들어갔다. 나는 부석 앞에서 타다남은 장작으로 불장난을 하고 있었다. 목욕이 대충 끝나고 엄마가 뜨거운 물을 통에 담아서 가지고 들어가고 나는 다른 통에 찬물을 담아서 밖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엄마가 부르면 방안으로 갖다 주었다. 그렇게 원임이도 목욕을 끝냈다.
이제는 내 차례다. 엄마는 목욕통에 뜨거운 물과 찬물을 이미 적당히 부어서 잘 섞어 놓았다. 그런데 두 번의 목욕이 끝난 뒤의 물은 더럽기 짝이 없었다. 물표면에 둥둥 떠있는 얇은 가닥의 수 많은 때국수는 물론이고 비눗물로 우중충한 색깔의 목욕물과 목욕통 바닥에 깔려있는 굵은 가닥들을 보는 순간 나는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가는 원임이의 얼굴에 슬쩍 비치던 웃음의 의미가 바로 이것 때문인가 싶어서 속으로 복수를 다짐했다. 그래도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는 원임이에게 국수 건질 때 쓰는 채를 가져오라고 한 뒤에 둥둥 떠있던 때를 건져내었다. 그나마 나에게 한 순간의 위로가 아닐 수 없었다.
지난 가을에 목욕을 하고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아 잘 때도 등거리가 근질근질했었다. 엄마가 보여주는 내 등과 배 그리고 팔과 다리에서 나오는 때는 그야 말로 한 줄기의 국수가닥처럼 굵었다. 나까지 목욕을 마치고 나자 엄마는 그 더러운 그러나 따뜻한 물에 우리가 벗어 놓았던 빤스, 난닝구, 내복, 양말 등을 넣고 빨래비누로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따뜻한 물을 그냥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빨래까지 마치고 나니 해는 벌써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엄마는 다시 저녁을 하려 정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원임이와 나는 목욕통을 치워야 되는데 그게 물이 워낙 많고 무거워 우리는 한 번에 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더러운 물을 오그랑통에 박재기로 담아서 샘가에 와서 쏟아 버렸다. 마당에 버리면 편한데 겨울이라 물이 얼어버리면 미끄러워질 염려가 있어 그러지는 못했다.
나 한 번, 원임이 한 번, 나 한 번, 원임이 한 번 그렇게 그 큰 빨간 통이 비워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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