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0월 01일 금요일
오늘은 추석이다.
당연히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고 어제 큰 방 웃목 한 쪽 구석에 바지와 함께 가지런히 놓아둔 흰색 스펙스 운동화를 신었다. 엄마와 어무이는 벌써 밖에서 제사상을 차릴 준비로 바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성주이가 일가 일곱 집이 지사를 같이 지내는데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지내기 때문에 설과 추석 때, 우리는 빨리 일어나서 이것 저것 해야 할 것이 많다. 엄마하고 어무이는 어제 준비한 음식이며 과일, 지사 지낼 때 사용하는 그릇 등을 준비하고 지사상위에 순서에 맞게 가지런히 놓아야 한다. 희야는 먼지가 쌓이고 낡아서 볼품은 없지만 우리 집에 하나 밖에 없는 8폭짜리 병풍을 꺼내서 먼지를 털고 차려놓은 지사상 뒤에 벌려 놓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오기 전에 지방을 쓰는데 고조할배 부터 우리 아부지까지 지방을 여덟장이나 쓴다. 참고로 고조할배는 할매가 두 분이란다. ‘우리 아부지도 둘인데 나도 나중에 둘이 될라나?’
그리고 나면 물에 불려놓은 밤을 치는 차례다. 물에 불은 알밤을 한 손으로 잡고 조그마한 칼을 다른 한 손으로 잡은 뒤 약간씩 힘을 주어 앞으로 쓱쓱 팽이를 깍듯이 밀어 주어 팔각 모양이 나도록 멋있게 깍아야 한다. 나도 한 번 해보았는데 나중에는 알맹이가 다 깍여져 버려서 그냥 내가 생밤으로 먹어 버렸다. 누나들은 정지와 마루를 오가며 엄마가 시키는 일들을 하는데 어제 잿물에 볏단으로 반짝 반짝 윤이 나게 닦아 놓은 그릇, 숫가락, 젓가락을 한 곳에 준비하고 향과 초를 지사상 앞에 가져다 놓고 물도 떠놓고 여러 가지 준비된 나물을 그릇에 담는 일들로 분주했다. 나는 마루로 나와서 마당으로 내려와 샘가에서 뻘건색 뚜레박으로 샘에서 물을 퍼서 대야에 물을 한 바가지 부은 다음, 찬물에 얼굴을 한 번 씻었다. 그리고 마당비를 들고 뜨럭 부터 시작해서 댓돌을 먼저 쓸고 샘이 있는 안마당을 쓸었는데 듬성듬성 잡풀들이 나있는 것들은 손으로 뽑았다. 마구간 앞도 깨끗하게 쓸었고 통시와 거름짜리가 있는 바깥마당도 깨끗하게 쓸었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
좀 있으니 남재, 덕재, 군재 형이 엄마한테 인사하러 왔다. 엄마하고 어무이는 일하다가 말고 빨리 방으로 들어 왔고 형들은 엄마하고 어무이 한테 같이 절을 하고 “아지매, 건강하시지예?” 하고는 다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나도 희야하고 같이 대문을 나섰고 군재희야 집과 덕재희야 집에 들러서 아재하고 아지매 한테 절하고 인사했다. 그리고 나와서 수임이집에 들러서 수임이 할매하고 아재, 아지매 한테 절하고 판지이, 순지이, 그네집을 거쳐서 다시 우리 집으로 왔다. 시간은 벌써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전부 희야하고 아침에 인사를 들렀던 집들의 일가친척 아재, 아지매, 형들인데 적어도 삼십 명은 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이 많은 아재들은 큰 마루 제사상 앞에서 자리를 잡고 그 다음은 마루로 연결된 큰 방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뜨럭 밑의 마당에 나락 말릴 때 쓰는 퍼런색 갑바를 펴놓고 그 위에 줄을 지어 섰다. 갑바우에만 스무 명은 올라선 것 같았다. 나도 마당에다 신발을 벗고 갑바 위 형들 뒤에 서있었는데 솔직히 마루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른다.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앞에서 절하면 따라서 하고 일어서면 따라서 일어서는 정도였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 보니 형들이 갑자기 우루루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지사가 끝난 것이다. 형들은 바깥마당을 지나 대문 밖으로 빠르게 몰려 나갔다. 마루 위의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려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형들은 겁나게 멋있어 보였다. 좋은 양복을 입고 까만색 구두도 신고 있었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 모양인데 돈을 많이 버는 모양이다. 지금은 대구로 이사 가서 마을에 살지 않지만 비산동, 내당동 등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딱 두 번 대구에 나가 밨는데 동네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경주희야 아재하고 아지매가 살고 있는 집에 엄마하고 가본 적이 있다. 테레비에서만 보던 모기를 없애는 하얀 연기가 엄청나오는 기계를 메고 집 앞 골목을 지나가는 아저씨를 보고 억수로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설과 추석때는 이렇게 마을을 떠나 대구로 이사 갔던 아재, 아지매들과 형들이 같이 지사 지내러 오는데 숫자가 제법 많았다.
아침 8시 반, 배가 고파올 시간이었다. 지사가 끝났으니 밥을 먹어야 되는데 사람 숫자가 너무 많아서 마루에 있는 어른들부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각자 국그릇 하나, 밥그릇 하나씩 차지하고 밥그릇에 준비한 많은 나물들을 넣고 국간장을 조금 넣은 다음에 비벼서 먹는다. 콩나물, 고사리, 시금치, 박나물, 무나물 등등. 그리고 옆에 썰어 놓은 돼지고기, 문어, 조기도 같이 한 입에 넣었다. 그러고 있는데 마루 위의 어른들은 벌써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와서 다음 집인 군재형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도 먹던 밥을 빨리 먹고 신발을 신고 군재형집으로 따라 갔다. 엄마는 우리집에서 제일 먼저 지사를 지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밥을 제일 많이 먹는다고 밥을 엄청 많이 한다.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는 거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닌데 우리는 다음날 또는 그 다음날 까지 남은 밥을 먹어야 되어서 고역이다.
이렇게 네 집의 지사를 마치고 나면 이제 동네 뒤쪽 공산(공동묘지가 있는 산)을 지나서 있는 법지 성훈이 희야집에 지사지내러 간다. 성후이 희야집에 가려면 먼저 동네 뒤끝까지 가서 다시 한 참을 걸어서 공산까지 가야 되고 산과 밭이 접한 작은 골짜기 같은 곳을 지나면 내리막길이 쭉 신부동까지 이어지는데 그 내리막길 중간 즈음에서 오른쪽으로 작은 길을 따라 논밭이 많은 쪽으로 내려가면 밭 한 복판에 기와집이 두 채가 있는데 거기가 성후이 형과 큰 아재가 사는 곳이다. 사람들 말로는 논도 많은 부자라카는데 와 거기서 그래 사는지 모리겠다. 어쨌든 여기 까지 올라카마 반 시간은 더 걸리고 또 수 십 명이 와야되니까 시간도 서로 맞지 않아서 적어도 다 같이 다시 모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래도 오는 길과 가는 길이 재미없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공산을 지날 때면 꼭 귀신이야기를 한다. 올해는 지난 밤에 성후이 아재가 마을에서 술 한잔 하고 밤에 집으로 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는데 어떤 놈이 씨름을 하자 케서 하는데 아무리 해도 안넘어 가더란다. 그러다 보니 날이 밝아 오고 정신이 들어서 보니 옆에 있던 소나무를 붙들고 있더라는 이야기.
그렇게 법지에서 지사를 끝내고 마을로 와서 또 두 집을 더 지내고 모든 지사를 마쳤다. 이제 배는 불러서 좀 전에 지나온 공산만해지고 그 어떤 것도 더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세시.
엄마, 어무이, 누나들은 그 많던 설거지를 모두 끝내고 마루 여기 저기 드러누워 있었다. 심지어 어무이는 코를 골고 있었다. 누나들은 한 쪽에 테레비를 켜두고 추석 특집 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이제는 산소로 성묘가는 일만 남았다. 이미 희야하고 나하고 남재희야, 덕재희야하고 몇 일전에 벌초는 갔다왔다. 조선낫, 왜낫 몇 자루, 까꾸리, 톱 등을 들고 갔는데 땀을 엄청흘맀다. 근데 고조할배 부터 할배 까지 모신 산소는 망개에 있고 아부지 산소는 해동촌에 있다. 해동촌은 정말 먼 곳이다. 망개는 우리가 걸어가도 한 시간도 안 걸리는데 저번에 전학간 정성균이가 살았던 해동촌은 먼저 동암1동을 지나서 선남다리 건너 면소재지에 가서 선남 국민학교를 거쳐서 종아리를 지나고 오도리를 지나서 한 참을 더 걸어 가야 해동촌이 나오고 그 마을 뒤에 있는 제법 높은 산 중턱에 아부지 산소가 있다. 걸어서는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라서 오늘은 못 갈거 같다고 엄마가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광주리에 음식과 향로, 촛대, 향, 술 한 병을 들고 망개로 향했다. 망개로 가는 길은 즐겁다.
마을 끝에 있는 방간을 지나서 취아대를 거쳐서 명포가는 길로 가다가 우리 중심에 논 즈음에 다다랏을 때 냇가를 건너 방천길을 따라 걷다 보면 대추나무가 대 여섯 그루 죽 서있는데 나는 망개 산소에 올 때 마다 여기서 빨갛게 잘 익은 달콤한 대추를 한 주먹씩 따다가 가는 길 오는 길 먹었다. 주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추석날 방천에 있는 대추 좀 따먹었다고 누가 머라 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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