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
“2020년 현재 대한민국,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한 저명한 소설가가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던진 한 마디이다. 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전 세계 6~7위의 군사력, 가장 선진적인 코로나바이러스 대처시스템을 가진 국가, 우리 스스로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는 마당에 이 무슨 해괴한 망발인가? 그러나 우리가 처한 노동의 현실을 조금만 살펴보면 그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수긍하게 될 것이다. 단지 이상한 점은 노동자인 우리가 자신의 노동현실을 둘러보는 것에 너무 인색하다는 점일 뿐. 세상의 인터넷이 너무 발달이 되어 전화기에서 단 몇 마디의 단어만 입력하면 엄청난 양의 자료를 곧 바로 눈 앞에서 확인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연도별 산재사망통계’라는 단어를 ‘구글(Google)’에 입력하면 곧 바로 여러 가지의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자료가 가장 객관적이며 믿음이 가는 자료로 판단된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의 국내에서 발생한 ‘산업재해현황’에 관한 여러 가지 지표를 포함한 표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뜨이는 수치가 바로 ‘사망자 수’이다. 2011년 1,860명에서 시작해서 2019년 2,020명 이다. 이를 365로 나누어 보면 하루에 노동현장에서 사망하는 사람의 숫자가 5.53명이다.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하루 평균 5.53명이 노동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OECD 1위 국가와 비교하면 20~30배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신성한 노동의 현장이 이렇게 위험해도 되는가? 우리 모두가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커녕, 반 노동환경을 지지하는 국회의원을 뽑게 되는 것일까? 위험한 노동현장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와 같은 노동자의 국회진출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노동자 스스로가 위험한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이것이 바로 이 상황을 해결하는데 가장 큰 문제점인 듯하다. 노동자인 나 스스로를 돌이켜 본 결과이다. 노동자인 나는 왜 이렇게 위험한 노동환경에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나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데 나의 팔, 다리 하나쯤 혹은 나의 목숨은 가볍게 여겨도 무방하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도록 내가 은연중에 교육받은 것은 아닐까?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너와 나의 생명이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생명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노동을 행사하고 또한 안전한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인 명제에 돈이라는 놈이 끼어든다. 안전한 노동환경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돈을 아끼기 위해서 노동자의 생명을 내 던져버린다. 버젓이 노동자의 생명과 돈과의 맞교환이 이루어진다. 이 어찌 ‘야만의 시대’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나? 몇 푼의 돈을 아끼려 하루에 대 여섯의 소중한 생명을 꺼뜨리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이렇게 다룰 진데 팔 하나, 다리 하나 잘려나가는 사람의 숫자야 일러 무엇 하겠나?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노동시장의 이분화이다. 정규직과 비 정규직, 본청과 하청 또는 사무직과 현장직의 노동구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사회문제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여러 번 들어보았을 구절인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이 있다.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명을 해할 수 있는 위험스러운 일들은 모두 비 정규직, 하청인력 또는 현장직 노동자들이 맡고 있는 상황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적인 약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시장에서도 약자의 위치에 있다. 그런 상황하에서 정규직, 본청 그리고 사무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모양새다. 약자에게 무한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시스템의 구축이 심화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목에 날카로운 칼날을 겨누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목숨이 위험해 질 수 있다고 위협하는 구조와 무엇이 다른가? 이런 상황에서 사회에 위험이 닥친다면 개인들은 어떤 식으로 행동하겠는가? 국가와 사회가 구조적으로 약자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는 공동체는 분명 안정성이 약화될 것이다. 이는 분명 우리사회가 의지를 가지고 고쳐나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노동자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함이 중요하다. 국회의원의 선출 시에 그 안량한 학력, 인맥, 재산 등을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위험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한 표를 주는 것은 어떨까?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야만의 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