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_ 민음사
서머셋 모옴
내가 좋아하는 서머셋 모옴의 장편소설이다. 그의 단편소설들을 특히나 마음에 들어 했던 기억이 있다. 책의 서문에서 암시하듯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날카로운 면도날을 넘어 서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라는 약간은 동양적인 사고가 이 책의 저변에 깔려있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첫 장을 펼쳤다. 책의 중반부를 지나면서 나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의 또 다른 책을 보면서도 나의 사고방식과의 동질감이 느껴졌던 것처럼 이 책도 유사한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작가는 동양철학에 심취하였던 듯하다. 특히 작가가 프랑스 태생 영국인이었던 터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작가가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대신한 전우의 죽음으로 촉발된 실존에 관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지며 삶의 밑바닥으로 뛰어 드는 미국의 젊은 청년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당시의 미국은 1차대전에서 승리하고 군사,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 최강국으로서 물질문명의 최첨단을 구가하고 있던 국가였지만, 한 전도유망한 미국의 청년이 실존의 문제에 매달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간과 경제력을 낭비하며 우여곡절 속에 결국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자신의 삶 속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이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 영국, 프랑스, 미국을 여행하고 이 와중에 주인공인 청년과 주위의 인물들과 교류를 하며 항상 그들 주위의 한 명으로 또는 소설 속의 화자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나는 이 글을 읽는 내내 작가가 실제 사실에 기반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 놓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소설에 대한 몰입도가 더 커졌던 것 같다. 당연히 작가는 자신의 관심주제에 대하여 주인공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가령, 삶과 죽음, 여자, 남자, 인생, 종교, 결혼, 예술 등 등 현대적인 관점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수 있으나 1900년대 초기의 시점이 배경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주제들은 한 인간이 청, 장년기를 보내면서 반드시 한 번은 깊이 고민해보고 나름의 해답을 찾아 내면화하여야 하는 주제들이 아닌가 한다.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서 부딪칠 수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하여 청년기에 치열하게 고민하여 나름의 결론을 얻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남이 되고, 나는 남의 인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