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12-24
1981년 12월 24일 목요일
내일은 크리스마스다.
방학하기 전부터 학교에서는 매년 그랬듯이 결핵 걸린 사람들을 돕는다는 이쁜 꽃 그림이 들어간 크리스마스씰을 판다고 했고 10장짜리 한 묶음에 백원 인가 2백원한다고 해서 한 묶음을 사두었다. 실제로 어디에 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친구들에게 보내는 카드나 다음에 쓰게 될 위문편지에 붙여서 보낼 예정이다. 그리고 테레비에서 보면 크리스마스 캐롤이 저녁마다 울리고 도시의 번화가에서는 크리스마스추리가 어느 곳에서나 반짝이고 있고, 서울의 시청 앞에서는 딸랑딸랑 종소리를 울리고 있는 사람 옆에 자선냄비가 1달전부터 나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집안이 아니다. 엄마는 초파일에 절에 가지만 가끔 굿도 하고 점을 보기도 하고 밤에 장독대에서 물 떠놓고 빌기도 하는데 교회는 가지 않는다. 엄마말로는 교회에 가면 제사를 못 지낸다고 한다. 그러면 큰 일이다. 우리 집에 일년에 제사만 8번인가 되고 설, 추석, 가을 모사까지 하면 11번이 넘는데 이거를 못하게 한다고 하니 우리는 교회에 못 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도시에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간다고 하던데, 그 사람들은 제사를 안 지내는지 궁금하다. 수임이 집처럼 교회도 가고 제사도 지내는 갑다. 수임이는 우리 일가인데 제사도 지내고 교회도 간다. 아재, 아지매 그리고 할매도 가는 거 같다.
교회는 동암1동에 있다. 주사 주는 아저씨집 근처에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데 약간 비탈진 오르막에 길게 늘어져 있다. 길옆에 들어 가는 문과 교회마당이 있고 넓은 돌계단을 너 댓개 오르면 다시 한 쪽 구석에 교회종탑이 서있는 조그만 마당이 있는데 그 안쪽으로 십자가표시가 올라있는 뾰족한 첨탑을 아우르는 교회건물이 있다. 겉으로는 작아 보이는데 들어가보면 제법 공간이 넓다. 아마도 근처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있을 것이다. 이런 촌 골짜기 마을에 교회가 와 있는지 이상할 따름이다. 돈도 많은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모아서 저거 끼리 소풍도 가고 선물도 주고 여러 가지 행사도 한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크리스마스다. 밤에 마을에 나가 보면 하늘에 뜬 달 말고는 깜깜한 마을에 교회의 빨간 십자가만 보이는데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거기에 크리스마스 추리를 꾸며서 밤새도록 반짝반짝 한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테레비에서 재밌는 영화를 보는 것 외에 별반 재밌는 일은 없다. 그래서 내일은 친구들과 교회에 가보려고 생각 중이다. 아마도 재수가 좋으면 작은 선물이라도 받을 수 있든지 적어도 맛있는 거라도 얻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선물이라면 라면 한 박스였으면 정말 좋겠다. 만일 내가 라면 한 박스를 얻게 되면 적어도 라면 개 수만큼 교회에 나가 줄 용의가 있다.
‘라면 한 봉지에 교회 한 번, 괜찮은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