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10-12
1980년 10월 12일 일요일
오늘은 팔, 다리, 어깨, 등짝 온몸이 뻐근하다. 어제 가을운동회를 해서 그런가 보다.
어제는 아침부터 바빴다. 학교는 평소 때와 같은 시간에 가지만 아래, 위 모두 반팔, 반바지로 된 운동복을 입고 몇 일전에 백오십 원을 주고 학교에서 단체로 산 안쪽은 파란색, 바깥쪽은 빨간색 머리띠를 메고 가방에는 책과 도시락대신 운동회에 필요한 콩 주머니와 곤봉 등을 넣고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운동회를 핑계로 용돈을 좀 달라고 했더니 2백원을 주길래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고 쏜살같이 마당을 달려나갔다. 2백원이면 오뎅 너 댓 개와 간장을 적당하게 뿌린 맛있는 오뎅국물을 먹을 수 있고, 떡뽁이도 한 접시 먹을 수 있고, 라면도 2개나 살 수 있고, 하드나 쭈쭈바도 2개나 살 수 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으면 좋겠지만 1년에 딱 두 세 번 일어 날까 말까 한 일이 오늘아침에 일어난 것이다. 대문을 나서니 벌써 흰색과 노란색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이 저마다 가방을 하나씩 메고 마을 길을 듬성 듬성 채우며 선남면소재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명포, 방아실, 취아대에 사는 아-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서 학교로 가니까 제법 많은 수의 아-들이 하나의 물결을 이루고 천천히 내려오는 중이었고 그 중에 뺑구하고 심이도 저 멀리 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아침에 엄마한테 2백원을 얻었다고 했더니 심이는 150원, 뺑구는 300원 얻었다며 하나는 자랑질하고 하나는 얼굴을 찌뿌리고 있었다. 어쨌든 점심시간에 같이 오뎅을 사먹자고 약속을 했다.
학교에 도착을 하니 선생님들은 벌써 조금 일찍 도착한 학생들 몇을 데리고 운동장가에 심어진 오래된 둥지나무 밑으로 천막을 칠 수 있도록 동네이름이 적힌 팻말을 꽂고 있거나 하얀 석회가루를 넣은 바퀴 2개 달린 작은 구루마 같은 거로 달달거리며 운동장트랙과 100미터 라인을 표시하고 있었다. 또 학교 건물 중앙으로부터 운동장을 가로질러 여러 갈래로 쭉 뻗어 나온 알록달록한 만국기들은 이미 둥지나무의 높은 가지에 잘 묶여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들과 더불어 분주하게 운동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장사하는 아저씨와 아줌마들이었다.
보통 운동회 날이면 오뎅파는 아줌마, 솜사탕파는 아저씨, 음료수나 과자를 파는 나이 든 할머니, 그리고 막걸리나 소주를 짝으로 배달하는 아저씨들로 운동장은 아이들 보다 먼저 붐비기 시작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줌마, 아저씨들이 먼저 교문 옆 큰 둥지나무 그늘 밑 목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훨씬 먼저 나와서 자리를 잡고 않아서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각 동네의 구락부 모임에서 나온 나이 많은 형들과 젊은 아줌마들이 각자 큰 가마솥과 가스버너, 그릇, 냄비, 도마 등을 가득 실은 경운기를 하나씩 몰고 와서 각자 자기 마을이름이 적힌 팻말을 보고 그 뒤에 경운기를 세우고 버너 위에 큰 솥을 걸고 동네이름이 적힌 천막을 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즈음 되어 우리는 모두 운동장에 모여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를 연거푸 해대면서 줄을 맞추고 교장선생님이 운동장에 있는 연단위로 올라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반들반들 하게 벗겨진 머리를 햇볓에 온전히 드러내고 연단에 오르신 교장선생님은 운동장에 정연하게 줄을 선 우리들에게 몇 마디 훈시를 하셨고, 연단 밑에 계시던 체육선생님은 곧 바로 화약총을 잡은 오른손을 번쩍 하늘로 들어 방아쇠를 당겼고 이어서 ‘꽝’하는 소리와 함께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운동회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꺼번에 진행되기 때문에 제법 큰 우리 국민학교 운동장이라도 6개학년이 같이 한 번에 운동장에서 운동회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2개 또는 3개학년이 운동장에서 밀고, 구르고, 달리는 동안에 나머지 3개학년은 운동장 밖 어느 지점에 줄을 잘 맞춰서 기다리고 있어야 된다. 근데 선생님이 그렇게 아이들을 잘 가두어 놓아도 어느 틈엔가 몇 몇 놈들은 슬쩍 빠져나가서 나무 그늘 밑 오뎅파는 아줌마한테 가서 급하게 오뎅을 사먹고 오느라 400미터 계주 달리기에 늦어 선생님에게 혼이 나는 놈들도 있었다. 그래도 그때쯤이 되니 벌써 운동장 밖 큰 그늘을 드리우는 팻말 앞에 각 마을에서 쳐놓은 천막에는 마을 동장어른과 청년회장, 부녀회장 그리고 제법 많은 어른들이 와있었다. 그리고 머리가 희끗한 노인네 몇 분은 벌써 막걸리 사발을 앞에 두고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고, 구르고 넘어지기도 하는 모습에는 관심도 없는 듯이 그들만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나는 아까부터 ‘동암2동’ 천막과 그 주위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우리 할매 같은 엄마가 거기에 와있는지 궁금했다. 분명히 오기는 올낀데, 조금 신경이 쓰였다. 아마도 어무이 하고 같이 남의 경운기를 얻어 타고 왔을 낀데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보나마나 양철도시락에 밥을 가득 담고 반찬통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볶음이나 달갈후라이, 김치 등을 담아서 이뿐 바뿌제에 잘 싸서 가져왔을 것이다. 그리고 달걀도 몇 개 삶고, 집을 나서기 전, 마을 점빵에서 사이다도 두 병 사서 가져왔을 것이다. 하나는 내 꺼고 또 하나는 원임이꺼.
점심시간이 지나고 우리학년 장애물 달리기 때 나는 등수에 들지 못했고, 100미터 달리기는 2등을 해서 손에 2자 도장을 받고 공책을 4권 받았다. 1등은 멋있는 짱가 그림이 있는 책받침과 타잔 크레파스를 받았는데 못내 아쉬웠다. 내년 운동회 때는 나도 타잔 크레파스를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