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_2019-01-30
아부지, 보시오.
내 기억에 아부지 한테 아부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소. 요즈음 애들은 아빠라고 하거나, 아버지라고도 하는데 나는 아부지라고 부르고 싶소. 내가 클 때는 다들 아부지라고 불렀으니 나도 그렇게 부르고 싶은 거요.
아부지는 당연히 어릴 때의 내 모습이 선명하겠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아부지의 희미한 모습마저도 그려낼 수 없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요. 그리고 지금은 제대로 된 사진도 한 장 남아있지 않으니 더더욱 그럴 수 밖에요. 아부지 돌아가시고 어무이가 몇 장 남은 아부지 사진을 태워버렸다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소. 어무이한테 먼 잘못을 그리 많이 했소? ^^
내 나이 일곱 살 때 아부지가 돌아가셨으니 나에게 아부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거는 당연한 거고 엄마도 아부지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으시더이다. 내가 물어보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겠지요. 아부지가 말씀이 많이 없었다던지, 동네사람들에게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는 것 정도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형님보다 아부지를 더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는 어릴 적 동네 어른들을 통해서 자주 듣기는 했는데 뭐 그리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소. 조금 기분이 나쁘시오?
엄마가 열일곱에 아부지한테 시집왔을 때 ‘쌀독에 겉보리 서말만 있더라’는 이야기는 엄마한테 내 여러 번 들었소. 그만큼 살림이 궁색했었다는 이야기로 들리오. 요즈음 같았으면 아부지는 평생 노총각으로 늙었을 지도 모르는데 어찌 보면 아부지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은 시절에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우스꽝스런 생각도 듭니다. 족보를 보니 아부지는 아들 셋과 딸 둘 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더군요. 그런데 우째 나는 사촌이 한 명도 없는지 모르겠소. 큰 아부지가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일본 여인과 혼인한 것으로 되어있고, 작은 아부지도 젊은 시절 만주로 갔고 그 곳에서 혼인을 한 것으로 되어있는 것을 최근에야 족보를 보고 알았소. 짐작컨데 우리 할매는 아부지보다 더 곡절 많은 삶은 살다 가신 것 같소. 그리고 두 명의 고모도 있더구만 그 분들은 다 어디 가셨소? 아부지가 할매를 모시고 어렵게 살림을 일구어 나갔을 것인데 어찌 그리 무정하게 한 자락 소식도 없으셨는지 형제들이 원망스럽지 않으시오? 내가 최근에 작가 이상의 ‘12월 12일’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아부지와 큰 아부지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였소. 아마 작가 이상이 아부지하고 연배가 비슷할 수도 있을 것 같소. 소설에서는 형님인 주인공이 가난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후, 가난을 피해 어머니를 모시고 일본으로 갔다가 모진 고생 끝에 한 살림을 장만하여 고향에 왔지만 결국 동생과는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는 결말을 가진 소설이었는데, 그렇게 가정하면 일본에 갔던 큰 아부지는 돌아 오시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소. 너무 나의 억측이겠지요?
아부지가 1912년에 태어나셨고, 나는 1971년에 태어났소. 거의 60년 세월의 차이가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소. 아부지 막내 며느리는 1976년에 태어났지요. 아부지가 며느리하고 이야기를 하는 거는 참 볼만 했을 거 같소. 남자로서 아부지는 참 대단하시오. 아니면 어무이가 그리 이뻤던 것이오? 물론 아들을 하나 더 갖고 싶으셨던 거겠지요. 그래서 내가 세상에 나오니 참으로 기쁘셨소? 그러시면 막내 아들이 클 때까지 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시지 그려셨소? 아부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나를 두고 그렇게 빨리 떠나시면 나는 어쩌란 말이오? 돌이켜 생각해보면 완전히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오. 이것은 단지 느낌이긴 한데, 한 겨울 큰 방에서 우리식구가 다 같이 크고 무거운 솜이불을 덮고 누워있었소. 아마도 아부지가 내 옆에 누워 있었던 것 같소. 나는 엄마하고 같이 자고 있었는데 이불이 무거워 답답한 터라 다리를 옆으로 척 올렸는데 무명옷을 입고 계셨는지 약간 거칠고 서늘한 느낌이 나는 사람이 옆에 있었던 거요. 물론 깜깜한 겨울 밤에 눈을 감고 있었으니 본 것은 아니고 그 느낌만 간직하고 있는 거지요. 이것을 기억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느낌이라고 한거요. 아부지는 나에게 그냥 느낌으로 남아 있소. 그것뿐이오.
나는 아부지가 젊은 시절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 궁금하오. 당연히 그 당시 궁핍한 살림살이에 홀어미를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고된 일이겠습니다 마는 나는 그러한 면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예를 들어 형제들이 모두 타국으로 떠난 후, 맏이가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당연한 시절에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고향에 남아 가난과 어머니를 모두 양 어깨에 짊어진 아부지의 심정 같은 것들 말이오. 불만과 분노에 휩싸여 모든 것을 버리고 훌훌 떠나고 싶지는 않으셨는지 말이오. 당연히 그러한 마음이 들었을거라 짐작하는데 어떻게 잘 버티어 내셨는지 알고 싶소. 천성적으로 아부지의 성품이 워낙 너그럽고 효심이 깊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말아주시오. 그런 것은 지금의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화만 돋구는 말씀이 될 것이오. 아부지의 인간적인 고뇌를 알고 싶소.
이미 만나서 알고 계시리다 마는 아부지의 큰 아들인 나의 형님이 아부지가 돌아가시던 연세보다 훨씬 더 젊은 나이인 환갑이 되기 전에 이승을 떠나셨소. 물론 아부지가 그러셨겠느냐 마는 나는 안타까웠소. 나름 열심히 사회생활을 해서 선출직공무원이 되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찰나였는데 말이오. 나는 형님이 아부지의 공덕으로 그렇게 출세를 하는 것 인줄 알았소.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한 본인의 출세가 도리어 자신의 명운을 줄이는 것 인줄 어찌 알았겠소? 어쨌든 나라도 사회적 명성에 큰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오. 가끔은 아부지의 연세보다 형님이 먼저 가셨고, 형님보다 내가 먼저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오. 이 무슨 망측한 생각인가 하시겠소 마는 하늘이 정해준 이치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도 우리 아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부지보다는 상황이 나을 것이오. 적어도 자신들이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 까지는 본인들의 아버지가 살아있었고,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이후에 어른이 되어서도 추억할 아름다운 일들이 있지 않겠소?
아부지,
아내가 둘 인 기분은 어떤 것이오? 아부지하고 엄마하고 어무이가 한 집에서 같이 산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오? 요즈음에는 법으로 엄격히 금지 된 일이기도 하거니와 허용이 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참 어려운 일일 듯 한데 아부지는 참 대단하시오. 아부지가 대단하신지 엄마가 그러한지 아니면 어무이가 잘 대처를 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소.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나도 밖에서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술 한잔하고 여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경우가 간혹 있었소. 그러한 일시적인 만남이야 십분 이해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평생을 같이 할 두 사람의 여인을 같은 지붕아래에 두고 생활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노력으로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겠소? 참으로 사사로운 것까지 묻는다고 꾸짖지는 마시오. 대답을 하지 않으셔도 그만이오.
아부지는 혹시 막내 며느리가 일본인이 될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오? 아마도 아버지의 큰 형님생각에 가슴이 툭 내려앉은 것은 아니시오? 온 집안이 다 아는 사실이오. 내가 한국에 데려와서 누나들과 자형들에도 인사를 시켰고 엄마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오. 사실 나는 엄마의 반응에 놀랐었소. 연세가 작지 않았던 엄마가 격렬하게 반대할 만도 한데 아무 말씀도 없이 순순히 인정하여 주시더이다. 결국은 그녀 부모님의 반대로 우리는 헤어졌지만 엄마는 연세에 비해 아주 세련된 면이 있다는 것을 그때에 비로소 알았소.
우리 남매의 사이가 더 이상 예전 같지는 않소.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소만 형님이 돌아가신 후, 점점 더 그러하오. 어무이도 거동이 불편하여 형님이 돌아가신 다음 노인병원에 들어가셨는데 얼마나 더 사시게 될지 걱정이오. 아부지가 잘 돌보아 주시오. 엄마, 아부지 제사는 조카가 형님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겠지요. 때가 되면 오셔서 맛있는 음식 배부르게 드시고 손자와 곧 태어날 증손자도 신경 써주시기를 바라오. 내 아이들은 내가 있으니 부탁 드리지는 않고 싶소.
듣지도 보지도 못할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늘여놓았소. 막내 아들의 어리광인양 너그러이 보아주시고, 편히 쉬시기를 바라오.
막내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