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순_아내_2019-01-28
나의 아내, 영순, 보오.
그대에게 ‘아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거니와 ‘해라체’가 아닌 ‘하오체’도 처음으로 사용해보니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소. 그러하더라도 ‘해라체’를 사용한다는 것은 더욱더 해서는 안 될 일로 여겨지기에 이 문체를 고수하겠소.
일상생활에서 그대를 ‘영순’으로 부르기도 했고, ‘순’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자네’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남들처럼 ‘여보’라고 불러보지는 못했구려. 아버지 없이 자라온 터라 아버지가 어머니를 어떻게 부르시는지를 배우지 못했을 뿐 더러 좋은 아버지와 좋은 남편이 되는 배움을 놓쳤다는 것은 나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그 영향이 곧바로 그대와 우리의 아이들에게 미쳤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 하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대와 아이들이 건강하게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몹시 행복한 남자요.
진심을 다하여 만난 첫 여인과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아 상심한 시기에 우연히 그대를 만났고, 나의 그런 사연을 알고 있음에도 나와의 만남을 지속하여 준 것에 감사하오. ‘인생에 그런 일 한번쯤 겪음이 없었다면 어찌 진실된 인생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라고 우스개 소리로 지껄일 수 있지만 그것이 본인의 일이 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그 일을 계기로 그대의 사람됨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고백하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 까지…’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우리의 결혼식 주례선생님께서 하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소. 다만, 나를 향한 그대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서글픈 듯했던 그대의 눈빛만이 기억나오. 그대를 항상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마음은 지금까지 저버린 적이 없지만 그 마음을 실행하기 위한 나의 행동은 그 다음날부터 지켜지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대를 심란하게 했음을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오. 아이를 갖지 못해 말로 다하지 못할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그래도 우리는 건강한 아이를 둘이나 무탈하게 가진 것에 대해 내 비록 무신론자 이지만 늘 그대와 하늘에 감사하오.
이후, 우리는 늘 떨어져 생활할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대가 나를 믿어 준 까닭에 우리의 생활은 행복했었던 것 같소. 그대도 동의를 하시는지?
나의 끈질긴 고집과 그대의 어거지 동의로, 우리는 프랑스에서 단촐한 생활을 시작했지만 외국에서의 생활이 참으로 만만한 것이 아님을 실감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소.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대와 두 명의 아이들과 항상 같이 했던 몇 년간의 시간에 나는 아직도 감사하며,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의 고집스러웠던 결정이 자랑스럽기까지 하오. 매 주말에 갔었던 버스종점여행, 아이들을 뒤에 태우고 인근 동네를 다녔던 자전거여행, 언덕에 올라서 시원한 바람과 싱그러운 햇볏속에서의 나물뜯기, 매일 저녁 아이들과 함께 한 동네 작은 동물원 나들이, 그리고 현지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얼근한 술 한잔.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수 백만의 황금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시간이었소. 실상 나는 이런 것들을 꿈꾸며 그 먼 곳으로의 여행을 감행했던 것이고 나는 결국 그것들을 이루었소. 이러한 결과를 두고 어찌 내가 나의 결정을 자랑스럽다고 못 할 이유가 있겠소. 그러나 ‘90%의 불행과 10%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생활도 그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음을 인정하오. 하지만 나에게는 그 10%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90%의 불행했던 아니면 행복하지 않았던 순간들을 덮고 남음이 있소. 그리고 나는 이미 그 90%의 순간들은 잊어 버린 듯 하오. 그러니 그 시절에 대한 나의 기억이란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차 넘쳐나올 지경이오. ‘아무리 어려웠던 시간도 지나면 추억’ 이라는 말을 실감하오.
귀국 후, 어려웠던 시절에 그대가 어쩔 수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 드는 것을 보며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고 가슴이 아팠으며 처가 식구들의 가족애를 절절이 느낄 수 있었소. 동시에 그대 앞에 친가를 내보이기가 부끄러웠소. 그럼에도 불편한 마음을 나에게 내보이는 것을 힘들어 하던 그대에게 한 없는 고마움을 느꼈소. 나의 벌이가 신통치 않아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그대가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살림에 보태겠다며 해왔던 이런 저런 일들을 보며 내 스스로 나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소.
이제는 그 때의 경제적 어려움이 어느 정도 지난 듯 하오만 인생에 그 만한 어려움이 어디 그 때 뿐이겠소. 어머니와의 이별이 오래지 않아 갑작스럽게 다가온 형님의 죽음, 그 이후에 벌어진 집안의 어수선함과 형수님과의 갈등, 이 모든 것이 나의 책임인 듯하여 항상 그대 앞에 고개를 떨구오. 다른 집안에서는 벌어질 수 있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 집안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듯 했던 그런 용렬하고 치사한 문제들을 앞에 놓고 사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소.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문재가 된 것에 무척 화가 났었소. 그러나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그냥 묻어 두고 싶었고, 그대의 양보만을 바라는 처지에 불과했소. 다행히 그대가 나의 처지를 이해하여 주어 또 한 번 그대에게 감사하오.
내 기억에 그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기억이 없소. 그대를 사랑하지 않음이 아니오. 다만 그런 통속한 표현을 그대에게 사용하고 싶지 않음이오.
분명히 말하지만, 앞으로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 보다 더 큰 아픔과 어려움이 다가올 것이오. 그것이 인생이기에… 하지만 그대가 내 곁에 있어, 내가 그대 곁에 있고, 그대가 나를 먼저 떠나거나, 내가 그대를 먼저 떠날지라도 그대가 나의 반쪽이었음을 기억하겠소.
그대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