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_딸_2019-01-27
이 인,
우리가 프랑스에서 살고 있을 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몇 일 후, 눈이 참 많이 오던 겨울날, 니 엄마가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다가 너를 낳았지. 생각지도 못했던 갑작스런 너와의 만남이 그렇게 우연하게도 어영부영 시작되었다.
니 오빠야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내가 업무적으로 몹시 바빠서 니 오빠야가 설 연휴에 세상에 나온 것을 고마워했을 정도이니, 니 엄마가 퇴원하고 집에 온 이후에도 니 오빠야 곁에 있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니가 병원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에는 내가 시간이 많이 있던 시기라 적어도 1년간은 내가 너를 키운 것이나 다름없었지. 니 엄마가 나의 이 말에 동의를 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니가 조금씩 커가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었단다. 너는 참으로 이쁘고 귀여운 아이였지. 너를 데리고 나들이를 할 때면 옆을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이 너를 보고 귀엽다고 한 마디씩 거들었을 뿐만 아니라, 니가 말을 시작할 때는 오히려 니가 먼저 버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의 허벅지를 슬쩍 만지고는 반응이 어떤가를 살피고 난 후, 미소를 한 번 쓱 날리는 아주 시크한 꼬맹이였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니? ^^
그러던 니가 이제 벌써 훌쩍 커서 아빠 보다는 남친이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구나! 니 엄마는 니가 화장품이나 옷을 살 때는 모아둔 용돈을 듬뿍 듬뿍 아끼지 않고 쓰면서 가족회식 때는 한 푼 안 쓰는 깍쟁이라고 나에게 고자질을 한다마는 그것마저 나에게는 이쁜 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과연 세상의 모든 아빠들이 나와 같은 심정인지?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딸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해야만 하는지 니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단다. 물론 나도 그 책을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 책의 제목이 워낙 직설적이고 의미하는 바가 커서 내가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듯하다. 너도 제목만 들어도 대충 어떤 이야기인지 짐작이 가리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책은 책 속 딸아이의 아버지가 쓴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그 사람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이제는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야기가 되는 시점이 온 것 같구나.
세상은 무섭고도 험하다. 그렇다고 마냥 어린아이처럼 엄마와 함께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어야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러한 시간이 너무 빨리 내 딸에게 가까이 오는 듯하여 나는 두렵다. 하지만 너를 보노라면 너의 방식대로 니가 원하는 삶을 훌륭하게 살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엄마의 딸로서, 오빠의 동생으로서, 할머니의 손녀로서, 친구의 친구로서, 선생님의 학생으로서, 내가 보는 너의 행동이나 판단은 벌써 아주 성숙할 뿐만 아니라 정직하다는 생각이다.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빨리 내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될 줄은 짐작도 못했다. ‘인생은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 했다가 준비되지 않은 채로 떠나 보내는 것’인가 보다. 내가 너같이 이쁜 딸아이를 가진 아빠로서의 교육을 미리 좀 받아 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마는 그것이 어디 나같이 평범한 아빠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더냐? 너희와 함께 하루 하루의 끼니를 굶지 않고 보낼 수 있음에 행복을 느끼는 나를 너는 이해할 수 있겠니?
이제는 시절이 변해서 니가 아빠에게 바라는 것이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바라던 것과는 많이 차이가 있을 줄로 안다. 많은 부분이 돈과 관련되어 있을 텐데, 불행하게도 니 아빠는 돈을 많이 벌어주는 사람이 못될 뿐만 아니라 또한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는 사람도 못되니 너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다만, 나는 니가 어린 시절, 너와 같이 온전하게 몇 년의 시간을 보냈음을 항상 위안으로 삼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가 너의 엄마와 오빠 사이에서 나름 스트레스가 많을 텐데 슬기롭게 잘 극복하는 듯하여 나는 너에게 항상 고맙다.
엄마, 아빠는 너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언젠가는 조용히 물러가겠지. 우리가 물러간 후, 니가 너의 아이들에게, 나의 손자, 손녀들에게, 미소 띤 얼굴로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너에게 남아 있기를 바라고 싶구나. 너무나 과분한 나의 욕심인가?
내가 나의 딸, 이인에게 보내는 나의 이 첫 편지는 형편없이 쓰여졌을지언정, 첫사랑에게 처음으로 고백을 전하는 연애편지인양 나에게는 아주 소중하다. 이런 나의 마음이 너에게 진심으로 전달되었는지 궁금하구나?
너의 회신을 가슴 졸이며 기다려도 되겠지?
이인 아빠